석어당은 임금이 정사를 보던 중화전 뒤편에 있다. 단청하지 않아 소박하게 보여 궁궐안에 있는 건물로는
의외의 모습을 하고 있는 곳인데 이곳의 역사는 가슴 아프게 남아 있었다. 석어당을 포스팅하려다 검색을
해 보니다음 지식에 이런 글들이 올라와 있다. 짧은 내용이지만 여기에 옯겨 놓으려 한다.
광해군에 의해 친정이 풍지박살나고 어린 아들 영창대군을 잃은 인목대비가 서인으로 폐출되어
오랜 세월 한으로 남은 곳이 석어당이다. 광해군 15년(1623)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인목대비는
석어당 앞마당에 광해군을 끓어 앉히고 36가지 죄를 물어 폐위시켜 교동으로 유배보낸다.
10년의 한을 풀은 곳이 이 석어당이다.
궁궐안에 들어오면 어디든 한이 서리지 않은 곳이 없다. 석어당의 건물은 마치 일본에 옛날식
2층 가정집 같은 평민이 사는 소박한 느낌이다. 이때는 국운의 쇄락하고 있어서였을까...앞마당
오른쪽에 보이는 나무는 오래된 고목나무인데 봄이면 살구꽃이 예쁘게 피는 나무이다.
꽃피는 봄에 이 살구나무에 꽃이 피면 다시 한번 오고 싶다.
즉조당
역사적으로 덕수궁은 비운의 궁궐로 알려져있는 이유가 마지막 황제 고종이 이곳에서 승하를 하셨다는 이유
뿐이 아닌 듯하다. 1897년 11월 명성황후의 장례식 날, 명성황후의 상여가 나간 곳이 덕수궁의 입구에 있는
" 대한문"이라고 한다.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 의해 살해되고 2년만의 일이다.
장례를 치른 후 명성황후의 신위는 지금의 덕흥전 자리에 있던 경효전에 모셔졌다. 고종황제는 경효전을 자주
찾아 직접 차를 올리고 명성황후의 넋을 위로 했다고 한다.
좌측에 준명당과 우측에 있는 즉조당은 건물이 이렇게 이여져 연결 되어있다.
덕홍전
겨우 백년 조금 지난 시간이 흘렀다, 그로부터 세상은 우주과학의 발전으로 달나라에 사람이 걸어 다녔고
화성을 탐험하고 전혀 다른 세상이됐다. 지금부터 백년이 지나면 과학의 발전으로 후손들은 또 얼마나 어
떻게 달라진 삶을 살까. 지금이라는 이 시간도 모두가 역사의 한페이지속으로 영원한 건 없는 것이니...
이 사진은 덕수궁 미술관에서 우리명화를 감상하고 나와 찍은 사진이다. 노을 빛이 살짝 드리워진 걸 보니
저녁무렵이다. 해는 조금 기울었고 멀리 시청 건물밖 온실창 같은 유리창까지 보인다.
덕수궁은 시내라 해도 교통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다. 시립미술관을 오면 주차장에 차를 맡기는데 주차비가
꽤 비싸서 이곳까지 일부러 들어와 볼 생각을 안했었다. 한국 명화 관람을 왔다가 궁이니 궁궐의 이야기에
관심이 생기는 건 당연한 일인가보다. 문화재청 홈에 들어가도 자료가 없었고 따로 책을 준비하지 않아서
역시 설명은 부족하게 포스팅을 하는 게 마음에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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